왕십리홍

토종 한국인이 본 독일 02. 자기주장이 없으면 안돼!

홍니버스 2024. 7. 2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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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경험에 바탕한 주관적 생각입니다. 일반화는 지양합니다.*

독일에 오기 전부터 자주 들은 이야기 2 가 있다. 독일뿐만 아니라 대부분 서구사회에서는 자기 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는 윗사람이 지시를 "내리면" 대답을 하는 탑-다운 방식, 혹은 아랫사람이 보고를 "올리는" 다운-탑 방식만이 존재했다. 그런데 독일 회사에서는 거기에 토론이라는 것이 더해진 형식이다. 주의할 점은, 토론을 할 때는 모두가 한 마디씩은 하는 게 암묵적인 룰인 것이다. 이때 아무 말을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이들이 내색은 안 하겠지만,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기 힘들다. 독일에선 자기주장을 갖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원래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 "이었다." 어릴 때부터 납득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거 아니다고 확고하게 말하는 어린이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회생활 하는 동안 이 부분을 아주 많이 도려내야 했다."홍, 어떻게 생각하나?" 라는 상사의 물음에 진짜로 내 의견을 얘기했다가 회의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자기주장하며 사는 건 내게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원래 타고난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간과한 것은 독일사회에서 이 자기주장이라는 것은 비단 직장 내 회의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모든 순간에 자기주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자기주장이 없다는 것은, 자기주장이 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굉장히 편리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독일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채 안되었을 때 일이다. 웹사이트에서 학생 할인된 교통 정기권을 사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정기권은 온라인 구매가 안되고, 역에 직접 가서 구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중앙역 고객 센터에 가서 이 정기권을 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담당자는 심드렁하게 "그런 정기권은 없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인터넷에서 봤다,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지만 담당자는 "없다"라고 짧게 대답하고 다음 고객을 받는 버튼을 눌러버렸다. 어눌한 독일어와, 그의 단호한 태도에 흔들린 나의 동공까지 그에게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당시의 독일인 남자친구가(현 남편) 함께 다시 그 역으로 가주었다. 결과는? 우리는 거의 40분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고 나서야 정기권을 살 수 있었다. 이번에도 직원은 그런 정기권은 없다고 했지만, 독일인 남자친구가 단호하고 무표정하게 분명 봤으니까 다시 확인해 달라며, 가격은 얼마고 어떻게 사는지 등등 자신이 찾은 정보를 쏟아냈다. 어어엇, 하며 당황하고 물러났던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렇게 끈질기게 구니 마냥 귀찮다는 듯 대하던 그 직원도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정기권을 살 수 있었다. 

독일에서 석사를 시작한 첫 학기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팀플 2개를 같이 하는 독일인 학생 P가 있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전형적인 프리라이더였다. 특히나 P는 늘 생글생글 웃으며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 학생 나를 타깃으로 삼은 듯했다. P는 말도 안 하고 내 보고서 템플릿을 베껴 쓰고는 했다. 내가 조사한 내용을 거의 글자 몇 군데 바꿔서 본인 것이라고 우겼다. 과제 제출 전에는 PPT 수정을 함께 하자며 카페테리아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P는 노트북조차 갖고 오지 않았다. P가 옆자리 앉은 다른 독일인 친구와 내가 아직 반도 못 알아듣던 독어로 수다를 떨 때, 나는 열심히 PPT를 수정했다. 속으로 화가 나며 '아니,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라며 화가 났다. 하지만 그래, 어차피 이후로 볼 일 없어.라고 생각하고 이것만 끝내고 손절하리라 생각했다. PPT 수정이 끝나고 다 됐다며 보여주자 P는 말했다. "어, 여기 도형들 배열이 안 맞아.. 다시 해줄래?"... 20분이 더 걸려서 수정을 끝내고, 제출 한 뒤 오늘까지 나는 P라면 질색을 한다. 차라리 그때 대꾸를 했다면, P와 나의 관계도 이것보단 나았을지도.  

그런 일들을 수차례 더 겪고 멘탈이 완전히 나갔다. 석사 첫 학기 말, 그러니까 독일에서 산지 8개월쯤 되어가는 때였다. 나는 자문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그 이야기를 듣던 독일인 친구 M이 말했다. "여기선 네가 너 자신 스스로를 지켜야 해. 안 그럼 모두가 너를 이용하려고 할 거야.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딱 말해, 당신 그러지 말라고. 그거 잘못된 행동이라고!" M의 말 덕분에 나는 용기를 얻었다. 언제까지고 이런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독일어 수업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독일어 수업은 회사에서 지원을 받아하는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무료지만 팀 내에서는 교육 예산을 써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니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하고 싶었다. 그런데 강사의 근태가 정말 가관이었다. 수업 당일 취소를 하거나 대면 교육인데 온라인으로 바꿔버리곤 했다. 애써 회사까지 온 학생들은 굳이 올 필요가 없는데 온 셈이 된 것이다. 그 독일인 강사를 회사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한 번은 수업에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런 사전공지도 없이. 그래서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해당 독일어 강의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썼다. 그런 행동이 반복되었고, 그로 인해 내가 굳이 회사에 오지 않고 재택 할 수 있는 날에 회사에 와서 30분 동안 강의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했다고. 직설적이지만 정중하게. 답장에 의하면, 해당 랭귀지 스쿨에서도 그런 상황을 몰랐다고 한다. 해당 강사와 이야기하겠다며, 사과를 전했다. 그 뒤 해당 독일인 강사는 수업 변경에 대해서 사전 공지를 하고 있다. 

흔히 한국은 고맥락, 독일은 저맥락 사회라고 하곤 한다. 한국은 "꼭 그걸 말로 해야만 알아?!"라는 정서가 있다면, 독일은 "말로 안 하면 어떻게 알아?"라는 정서가 있다고 느낀다. 독일에선 말로 안 하면, 괜찮은 줄 안다. 아닐 땐 아니라고 해야 한다. 정말 아니다 싶어서 서로 감정이 상하기 전에, 상대를 멈추고 말하는 것이다. "저기요? 안 괜찮네요?" 아직 화를 낼 필요도 없다. 그러면 상대는 아, 만만한 사람이 아니군, 하며 "아 실례." 할 것이다. 타인의 존중을 받고 싶다면, 나부터 내 의견을 존중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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