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고민이 되는 한 가지가 생겼다. 내가 요구/요청을 잘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걸 알게 된 계기는 회사였다. 우리 팀 내 나와 직속 상사는 그다지 교류가 없다. 마지막으로 1:1 대화를 한 것은 9월이었고, 계약 연장에 대해서 얘기를 한 것이 다였다. 그녀는 내 퍼포먼스에 대해서 만족하고 기쁘다고 했으나, 나는 그때까지의 나의 퍼포먼스가 내 실제 역량에 비해서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칭찬은 으레 하는 이야기로 흘려들었다. 그 후로도 종종 팀원들과 (이들과는 비교적 자주 얘기하고, 수다 떨고, 밥도 먹는 편) 이야기할 때, 나의 직속 상사가 꽤 까다로운 사람인데 나를 참 마음에 들어 한다고 들었다.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던 중 팀원 1명이 퇴사하게 되어 충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상사는 그 자리를 내부 구인공고에 올렸다. 이를 본 회사 동료 2명 정도가 나에게 "상사하고 얘기해보지 그래? 그 자리 네가 할 수 있는지." 하고 이야기했는데, 갑작스럽게도 거부감을 굉장히 크게 느낀 것이다. 상사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먼저 물어봤을텐데, 안 물어보고 공고를 올렸다는 건 이미 나는 고려 대상이라는 뜻 아닌가? 그런데 내가 굳이 가서 재차 물어보고 확인사살 차 거절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 나를 넣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나서 다음날부터 나는 아,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예가 있다. 독일은 요새 5시면 해가 져서 어두워진다. 4시쯤부터 직원들은 데스크 스탠드를 켜는데, 보통 옆자리 직원이 본인 데스크 램프를 켜면 내 책상까지 충분히 밝아진다. 그래서 나는 내 데스크 스탠드는 끈 채 일을 하다가, 옆자리 팀원이 먼저 집에 가며 데스크 스탠드를 껐다. 그와 동시에 "아, 꺼도 괜찮아? 너 꺼 켜줄까?' 라고 물었다. 데스크 스탠드 스위치가 일어서서 켜야 하는 곳에 있고, 나는 앉아 있었고, 그는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속으로는 아 켜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입으로 "아니, 괜찮아!"라고 해버렸다. 왜?????? 그 동료가 사려 깊고 센스 있는 편이라, 듣고도 씩 웃더니 스탠드를 켜주고 갔다. 그리고 나는 내가 너무 이상하고 바보 같다고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독일에 온 후 나는 요구/요청에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뭔가를 요청하기가 부담스럽고, 굉장히 미안한 느낌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크고작은 요청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과도한 긴장과 거부감이었다.
그래서 요구/요청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검색해봤는데, 거절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만 잔뜩 나온다. 나는 거절은 잘한다. 대안 제시도 잘 하는 편인 것 같다. 예를 들어서, 뭔가가 내 형편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하기에 벅찬데, 이 정도로 해도 되느냐?라고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요청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일종의 독일에서의 생활 초창기로부터 오는 트라우마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우선, 독일에서도 읽씹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은 있지만, 그 정도가 한국에서만큼은 아닌 것 같다. 상황을 예로 들자면, 누군가 내 연락을 읽씹하면 한국에서는 100 정도 기분 나빠하지만, 독일은 그 강도가 50~60 정도로 덜 한 것 같다. 관심 없나 보지, 모르나 보지, 하고 어깨를 으쓱하는 수준? 이런 일이 개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다소 공적인 관계에서도 발생하는 게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예를 들어서, 회사 내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게 있어서 물어봤는데, 답변을 안 한다. Follow up으로 연락해도 연락이 없다. 전화를 하거나 찾아가서 얘기하면 그제야 들어주거나 왜 답변이 없었는지 설명해준다. (아니 이걸 왜 굳이 찾아가서 들어야 하는가?)
실제로 겪은 이런 상황의 예를 정말 많이 들 수 있다. 한번은 긴급하게 보험회사에서 확인 서류를 받을 것이 있었는데, 2주일이 지나도 답을 못 받았다. 물론 그 사이 나는 이메일 및 고객센터 전화를 통해서 연락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2주 후 보험회사 센터에 못 참고 찾아갔는데, 요청한 서류를 10분 만에 받았고, 그들이 내 요청을 다 확인했고 알고 있었으나 시스템 오류 (라는 변명을 유럽 전역에서 정말 많이 함. 변명인지 진짠지도 모르겠음.) 때문에 처리를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럼 그 2주 사이 이런 이유로 처리가 안되었으므로, 센터에 직접 방문해서 받아가라고 안내를 해줬으면 될 것이 아닌가??
이런 경우들을 겪으면서 독일에서 요청, 요구는 너무 힘든 것이 되어버렸다.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다. 내가 매달려서 들들 볶아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느낌이 뇌리에 박히고 나서는, 요구나 요청을 하는 것 자체가 소모적이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곳도 타이틀이 있으면 그 과정이 훨씬 수월하다. 회사 내에서도 워킹 스튜던트인 내가 요청하면 무시되는 것들이, 정직원인 팀원들이 요청하면 신속하게 처리되는 허탈함을 몇 번 겪었다. 나도 정직원이었으니, 인턴/워킹 스튜던트의 요청사항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겪은 건 정말 노골적인 무시였다. 11월인 지금 8월부터 요청했는데 답변 못 받은 일도 있다. 이건 화가 나기 때문에 찾아가서 따져볼 생각으로 벼르고 있다.
문제는 독일에서는 요청/요구를 하지 않으면 누가 알아서 챙겨주지 않는다. 한국사회와 가장 큰 차이점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팀 내에 속해있으면, 아니 이거 우리 팀에도 알려줘야지! 하고 작든 크든 서로를 챙겨주는 문화가 있었다. 물론, 그게 오지랖과 참견으로 변질되어 개인을 귀찮게 하는 경우도 정말 많이 봤지만 말이다. 반면, 독일에서 외국인으로 살다보니 적어도 내 사생활에 대해 누가 이래라저래라, 감 놓고 배 놓는 경우가 없어서 편하다. 동시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개인 단위에서 끈질기게 요구해서 얻어내야 하는 피로가 있다. 모든 것은 명암이 있는 법이다.
오늘도 요청해야할 것을 미루면서 의식의 흐름대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것도 적응의 과정일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편안하게 요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다. 부디 이 불편함이, 내가 요청을 못하는 나를 답답하게 여기는 마음이 일시적인 것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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