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홍

20220307 독일에 오기 전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 - 삶의 질이 떨어질 각오

홍니버스 2022. 3. 7. 22:12
반응형

독일에 오기 전에 독일에서의 삶의 장/단점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오래 걸리는 행정절차, 불친절한 사람들, 독일어라는 큰 관문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모든 것을 종합해서, 만약 누군가 독일에 살 때 최대 단점이 뭐냐고 물어보면 한마디로 일시적으로 삶의 질이 떨어질 각오를 해야한다고 하고 싶다. 작년에 독일에 오기 전의 내게 말해줄 수 있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독일에 오는 이유는 삶의 질을 누리기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인데, 삶의 질이 떨어진다니 무슨 말일까? 전자에서 말하는 삶의 질은 흔히 저녁이 있는 삶, 곧 워라밸을 누린다는 것인데, 이 자체가 곧 전반적인 삶의 질을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이 글에서 짚고 싶은 삶의 질은 매일매일 불편함과 수고로움 없이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이다. 

지난 주말부터 오늘까지의 요 며칠은 매일이 이런 불편함과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며칠전 다른 도시에서 미팅이 있어서 전날 기차 티켓을 사고 시간에 맞춰 역으로 갔다. 거의 4번을 5분, 10분 단위로 연착이 되어 결국 30분 정도 출발이 늦어졌다. 다행인 건 티켓을 이른 시간으로 사놔서 미팅 시간에는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기차 연착되는 건 좀 익숙해진 것 같다. 엄청 신경을 긁진 않았다.

며칠 뒤, 통학을 위해서 DB 도이치반 월 정기권을 사야했다. 그런데 이 티켓은 온라인으로 살 수 없고 HBF (중앙역)에 가서 사야 한다고 한다. 중앙역에 가서 인포데스크에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문의를 해서 알려준 오피스로 갔더니, 본인 담당 아니라며 다른데 가보라고 한다. 다른 오피스를 찾아가니, 다음 학기 등록증을 가지고 오라는데 이 등록증은 학기가 시작하지 않았으므로 아직 학교 포탈에서 발급받을 수 없는 문서이다. 그리고 이 문서가 없기 때문에 나는 학생 월 정기권을 살 수 없었고, 다른 월 정기권은 원래 쓰던 티켓보다도 10유로가 더 비싼 것이었다. 결국에는 티켓을 사지 못했다. 

파트타임 잡을 연장을 위해서 계약서를 쓰고 있는데, 비자 관련 추가 문서를 요청받았다. 이미 지난번에 문서 없이 계약을 했는데, 단순 연장 (Renewal) 하는 지금에서야 그 문서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기관에서는 비자 받을 때 받은 안내문이라는데 도통 나는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관련해서 갖고 있는 자료를 다 보냈는데 열흘 지나서(=계약 기간 시작 직전) 그 문서가 없어서 계약이 불가하단다. 마음이 급해져서 외국인청에 전화해서 물어보니 해당 문서를 줬어야 하는데 외국인청에서 누락이 된 것이었고, 보내주겠다고 했다. 다만 그 내용은 그저 안내문일 뿐이기 때문에, 체류허가증이 있는 한 고용계약을 하는 데에 필요한 문서도 아니고 기관에서 그 문서 없이 계약이 안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당 내용 그대로 기관에 보내니, 그래도 그들은 그 종이가 필요하니 받으면 연락하란다. 정부기관인 외국인청에서 없어도 된다는 문서를 요청하며 그게 없으면 계약이 안된다는 엄포를 놓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좋은 기회이고, 나는 일을 하게 됨에 감사하지만, 사실 이 소득이 내 재정상황에 큰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라 일종의 자원봉사 차원으로 생각하고 있던 일인데 이렇게까지 들볶이며 (?) 해야 하나? 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준다고 했으니 됐어. 하고 점심을 먹는데 택배가 왔다. 인터폰으로 문을 열어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택배가 오지 않았다. 이메일에는 내가 택배를 수령했다고 되어 있었다. 사는 빌딩을 다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설마? 혹시나 해서 빌딩 엘리베이터에 가보니 택배가 엘리베이터 안에 덩그러니 있었다. 3층까지 올라오기 귀찮아서 엘리베이터에 3층을 누르고 넣어버린 것이다. 30년을 넘게 독일에서 산 독일인 남자친구도 그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했다. 상상 이상의 새로운 불편함이 벌어지는 곳, 독일.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날때는 지금처럼 매일, 드물 때도 한 달에 두세 번씩 있는 것 같다. 택배가 가장 잦은 이유이고, 그 외 서비스나 문서 관련된 일은 이런 경험 때문에 시작 전 지레 겁부터 난다.

독일인들은 이런거에 화도 안 나나? 하고 생각해보니 내가 한국인이어서 유독 이런 일들을 더 크게,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평균적인 한국사람들이라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 이런 일을 겪었을 때는 이게 무슨 경우야? 하는 황당함, 당황스러움이 앞섰고 지금은 또냐?라는 짜증이 앞서는 것 같다. 이마저도 지나면 체념해서 그래라...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아마 그 단계까지는 조금 더 적응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추가로 독일인들의 대화 방식에 적응하는 것, 독일 친구들을 만드는 것 등... 전반적으로 이곳에 정말 적응해서 이제 별문제 없이 (혹은 문제가 있어도 체념하고, 큰 스트레스받지 않으며) 살기까지는, 한국에 있을 때와 비교해서 삶의 질이 떨어질 각오를 해야하는 것 같다. 독일에 온 지 9개월째이지만, 앞으로도 한동안 독일어를 보면 겁을 먹고, 열차 지연에 눈살을 찌푸리고, 택배를 찾아 빌딩을 뒤지고, 독일인들과 이메일로 말씨름을 하게 되며, 주말에 마음 맞는 친구와 만나 쇼핑하고 수다 떠는 즐거운 주말은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이건 왜 이래! 하며 한국과 일일이 비교하며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억지로 가짜 긍정을 내게 강요하며 밝은 면만 보라고 나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도 않다. 그냥 한동안은, 앞으로도 향후 몇 년은, 독일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동안 삶의 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인정하고 해내고 싶다. 몇년 후 오늘은 생각하면 그런 때도 있었어. 하고 희미해지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반응형